망설임의 윤리, 기록이 망각이 되는 자리에서 - 권주희 (2026)

정희수의 《무두루춘, 모레도 내일도 할 고민》은 하나의 역설에서 출발한다. 기록은 기억을 보존하는가, 아니면 망각을 재촉하는가. 작가가 사촌 동생의 영상 앞에서 마주한 사적인 상실, 즉 기록된 유년의 이미지가 도리어 성인이 된 그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듯한 경험은 오키나와라는 거대한 정치적 망각의 장(場)과 공명한다. 토도로키 동굴의 안내석이 피난의 역사는 새기되 학살의 역사는 침묵하듯, 기록은 언제나 무엇을 새길지 선택함으로써 한편으론 무엇을 지울지 결정한다. 이처럼 정희수 작업의 미학적 핵심은 선택과 배제의 정치학을 가시화하는 데 있다. 피에르 노라가 말한 ’기억의 장소(lieux de mémoire)’는 본래 기억이 더 이상 자연스럽게 살아 있지 않은 곳에 세워지는 인공적 보철물이다. 오키나와의 동굴들은 이러한 개념의 잔혹한 분기를 보여준다. 〈히메유리탑〉의 서사로 봉인된 동굴은 관광이라는 형태로 기억되고, 학살이 일어난 동굴은 관리의 부재 속에서 소멸한다. 국가권력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산업화함으로써 더 효율적으로 망각한다. 정희수가 포착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망각의 차등적 속도다. 그의 작업이 다크 투어리즘의 기록을 넘어서는 지점은 작가가 재현 자체를 의심한다는 데 있다. 사진으로 오키나와를 옮기는 행위가 ‘우리와 그들‘의 구도, 응시하는 주체와 응시당하는 타자라는 구조 속에서 기록은 언제든 또 다른 권력의 형식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통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행위는 기억을 위한 윤리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타인의 경험을 소비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작가가 내놓은 응답은 이러한 모순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사진 안에 VR 헤드셋을 쓴 채 등장한다. 몸은 오키나와의 흙을 밟고 있으나 시선은 가상을 향하는 분열된 신체는, 어떤 기록자도 그 장소에 온전히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의 시각적 고백이다. 이는 재현의 투명성이라는 환상을 깨뜨린다. 작가는 자신의 매개된 시선, 불가피한 거리와 오류를 화면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관찰자의 비가시성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신화를 거부한다. 카메라 뒤에 자신을 감추는 대신, 카메라 앞에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면서, 다큐멘터리적 기록이 오랫동안 품어온 ’객관적 관찰자‘라는 환상을 흔든다. 작업의 핵심은 전시명인 ‘무두루춘’에 응축되어 있다. 무두루춘은 결정하기 어렵고 쉽게 판단할 수 없어 망설이는 상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방향을 잃은 상태를 일컫는다. 작가는 작가와 관광객, 기록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귀결되지 않는 자신의 위치를,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외부자이기에, 그 땅의 일부가 될 수 없기에, 침략과 비극의 장소에서 역설적으로 ‘평범함’을 본다. 그리고 평범함의 발견을 통해 한때 이곳에서 일어났던 평범하지 않은 일을 비로소 감지한다. 익숙함에 침잠하는 내부자의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거리를 둔 이방인의 어긋난 시선에서 솟아오른다. 따라서 작가의 망설임은 타자의 고통을 함부로 이해했다고 선언하지 않으려는 윤리적 자제다. 일상적 풍경 안에 전쟁기 동굴의 증언, 전후 정신보건의 실태, 미군을 따라 건너간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병치하는 몽타주 전략 또한 이 윤리와 맞닿아 있다. 이질적 목소리들은 하나의 영상에서 섞이되 매끄러운 단일 서사로 통합되지 않는다. 발화되지 못한 익명의 목소리들은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빌려 울린다. 작가는 그들을 대변하기보다 다만 그들의 침묵에 공명할 공간을 연다. 결국 정희수가 도달한 자리는 화해도 정복도 아닌 제3의 지점이다. 섬의 일부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 불가능성 자체를 하나의 수행적 전유로 전환하는 것. 이는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려는 동일시의 폭력도, 무관한 관조자로 물러서는 냉담함도 아니다. 속할 수 없는 자리에서, 그럼에도 계속 머무르며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는 태도, 작가가 말하는 ‘이해되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 감정적인 대화들’, ‘비언어적인 감각들’에 대한 감화가 이러한 머무름을 지탱한다. ‘모레도 내일도 할 고민’이라는 전시명이 시사하듯, 정희수의 작업은 결론을 유보한다. 여기서 유보는 무책임한 회피가 아닌, 구조적 폭력 이후의 장소를 다루는 모든 시도가 마땅히 떠안아야 할 항구적 망설임이다. 동아시아 전역에 퍼진 폭력의 잔여를 향해, 그는 정답 대신 계속 고민하겠다는 약속을 내민다. ■